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풍함 사건 (문단 편집) === 쑨원의 광저우 귀환 === 1922년 3월 21일 쑨원의 심복 등갱이 암살당하자 쑨원은 천중밍과의 동맹을 실패로 규정하고 천중밍을 광동성장, 내무부장, 월군 총사령관에서 해임했다. [[왕징웨이]]와 [[랴오중카이]]는 이에 반대하며 천중밍의 직위를 유지시킬 것을 건의했지만 쑨원은 듣지 않았다. 천중밍의 부하 예쥐가 12,0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천중밍의 복직을 요구했지만 쑨원은 묵살하고 5월, 강서성으로의 북벌에 착수했다. 랴오중카이는 천중밍의 위세를 잘 알았기 때문에 쑨원에게 천중밍과 담판을 지을 것을 촉구했다. 천중밍의 부대가 혜주에 집결하는 등 광저우의 분위기기 험악해지자 6월 1일 쑨원은 50명 정도의 경호원을 거느려 광저우로 돌아와 천중밍과 협상을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천중밍은 쑨원이 비상 대총통에서 하야하지 않으면 담판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쑨원을 말썽꾼으로 여기던 열강과 북벌이 시기상조라 여긴 [[중국 공산당]], 북벌이 광동의 재정에 많은 부담을 준 것에 불만을 가지던 광동의 신사층 역시 천중밍의 주장에 동조했다. 천중밍의 부하 예쥐는 "유독성 포탄을 발사하는 15센티미터 대포로 3시간 안에 60개 대대를 깡그리 박살낼 수 있다."라고 쑨원이 하야하지 않으면 독가스를 살포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쑨원은 물러서지 않고 6월 12일 기자회견을 통해 천중밍과 맞붙어 싸우겠다고 천명했다. 6월 14일 천중밍은 혜주에서 랴오중카이에게 전보를 보내 은행잔고를 모조리 이체하겠다고 알려왔다. 랴오중카이는 천중밍과 쑨원의 화해를 주선하기 위해 혜주로 갔으나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구금당했다.[* 이후 부인 [[허샹닝]]이 8월 백운산에서 열린 천중밍의 군사회의에 찾아가 랴오중카이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한 덕분에 풀려나게 되었고 8월 21일 상하이의 쑨원에게 합류했다. 자세한 것은 [[허샹닝]]과 [[랴오중카이]] 문서 참조.] 6월 14일, 천중밍의 부대가 광저우로 진입하여 관음산 월수루의 쑨원의 사령부를 포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